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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익명성과 외로움 속에서도 사람은 사랑을 갈구합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은 그런 인간의 내면을 두 개의 사랑 이야기로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입니다.

1. 첫 번째 이야기: 기한 만료된 파인애플과 이별의 상처
영화의 첫 번째 이야기는 경찰 223호(금성무 분)의 시점에서 펼쳐집니다. 그는 생일이자 이별 한 달째 되는 날까지 여자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립니다. 그가 매일 구매하는 파인애플 통조림은 유통기한이 '5월 1일'로 통일돼 있는데, 이는 사랑의 유효기간을 상징합니다. 그런 223호 앞에 나타난 한 여성(임청하 분)은 금발 가발과 선글라스를 쓴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그 여성은 자신만의 사연을 안고 도시를 헤매며, 두 사람은 묘한 인연으로 하루를 함께 보냅니다.

이 이야기는 외로움에 잠식된 두 사람이 우연한 하루를 통해 서로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는 구조입니다. 특히 왕가위 감독 특유의 몽환적 영상미와 빠른 카메라 워크는 두 인물의 고독함을 더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마음까지 닿기는 어렵다"는 영화 속 대사는 사랑의 허무함과 동시에 찰나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2. 두 번째 이야기: 감정이 스며드는 카페와 슬며시 열리는 마음
두 번째 이야기는 경찰 663호(양조위 분)와 카페 점원 왕페이(왕페이 분)의 이야기입니다.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무기력해진 663호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커피를 사 마시며 일상을 버팁니다. 그를 멀리서 지켜보던 왕페이는 점차 그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몰래 그의 집을 청소하며 감정을 키워갑니다. 이 설정은 다소 환상적이지만, 그녀의 순수한 마음과 혼란스러운 도시의 정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왕페이의 테마곡처럼 사용된 'California Dreamin''은 이야기 내내 반복되며 캐릭터의 감정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마치 음악이 감정의 해설자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조용히 다가온 관심과 일상의 틈새에서 피어난 감정은 어느새 사랑으로 자라나고, 마지막 공항 장면에서 663호가 말하는 "여행은 언제 떠나세요?"라는 대사는 이제는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가는 전환점임을 암시합니다.

3. 왕가위의 스타일: 도시, 감정, 영상의 삼박자
‘중경삼림’은 홍콩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도시 그 자체를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그려냅니다. 빠르게 흐르는 인파, 좁은 골목, 흐릿한 네온사인 속에서 인물들은 소외되고 있지만 동시에 서로를 향한 갈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왕가위 감독은 짧고 단절된 내레이션, 비선형 편집, 그리고 느린 셔터 영상과 음악의 반복으로 감정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데 탁월합니다.

두 개의 이야기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사랑의 가능성과 시작'이라는 공통된 정서로 긴밀히 연결됩니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사랑이야기지만, 관객은 각자의 감정선에 맞춰 몰입하게 됩니다. 또한 이 영화는 대사를 최소화하고 시각적 은유로 감정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감정의 여백을 관객에게 열어주는 독특한 힘을 가집니다.
느낀점
찰나의 스침조차 영원한 기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중경삼림’은 두 개의 사랑 이야기로 조용히 말해줍니다.